方寸에 드넓은 天地를 새기다
- 竹庵 呂星九先生의 印譜集에 붙여 -
‘희망’,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진 迎春花가 담장에 길게 늘어져 웃고 있다. 올해 유독 극성을 부린 미세먼지를 이기고, “모든 꽃으로 하여금 이제 꽃을 피워도 괜찮다(迎春一花引來百花開)”고 알린 ‘봄맞이꽃’이기에 더더욱 반갑다. 타고난 일복인지 방학 중에도 출근의 연속이었고, 이제 다시 신학기 개학을 맞이하였다. 점심이후 散步를 즐기려는 중, 평소 형제의 情으로 지내는 竹庵先生의 印譜集 서문을 부탁받았다.
淺學菲才인 저로서는 堪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2011년 篆刻으로 『千字文集』을 낸 후, <一作四刻展>, <筆墨遊興> 등의 작품전을 보았고, 이번에 『菜根譚』 전문을 새겨 출판한다고 하니 먼저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지난 因緣을 되돌아보며 채근담과 전각에 대한 所見을 아래와 같이 두서없이 엮어 본다.
먼저 『채근담』은 중국 명나라 말 萬曆(1573-1619)시대의 문인 還初道人 洪自誠이 저작한 책이다. 책의 구성은 전집 225조, 후집 134조로 對句를 많이 쓴 간결한 美文인 전후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집은 주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과 직무 처리의 임기응변하는 仕官保身의 길을 말하였고, 후집에서는 은퇴한 후, 자연에서의 閑居하는 즐거움과 인생의 처세를 기술하였다.
책 제목인 ‘菜根’은 宋나라 汪信民의 『小學』 “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에서 따온 말로 나무 잎사귀나 뿌리처럼 변변치 않은 음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세상에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책의 내용은 警句的인 단문들이지만 “나물 뿌리에서 느껴지는 깊고 담담한 맛처럼, 소박하고 단순하여 결코 지루하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지혜를 일깨워주며, “속세와 더불어 살아가되 비루함과 천박함에 떨어지지 않게” 도와준다고 한다. 斷言하건데 구구절절이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참된 뜻과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篆刻의 역사는 먼저 印(도장)의 역사와 같이 할 수 있는데, 신석기시대의 질그릇에 문양을 찍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인의 기원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중국의 경우를 보면, 새김의 기원은 오래 되었다. 殷商시대의 甲骨文과 金文의 새김은 且置하더라도, 이미 상공업이 급속히 발달한 전국시대 초기부터는 인의 새김이 유통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예로 이들 시기에 사용했던 다량의 古璽가 전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秦代에는 황제가 사용한 인을 ‘璽’, 신하가 사용한 것은 ‘印’이라 칭하며 ‘璽’는 玉이나 金으로 만들었다. 木簡이나 竹簡이 사용되던 秦漢시대에는 簡牘의 묶음위에 점토를 입혀 鈐印하여 함부로 개봉할 수 없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封泥라 한다. 이들은 대체로 白文(음각)인데 점토에 찍으면 돋을 문자로 나타난다.
종이의 보급이 원활해진 後漢에서 南北朝시대부터는 봉니의 소멸과 함께 종이에 찍는 朱文印(양각)이 나타났고, 이는 隋·唐시대 특유의 인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宋·金·元·明·靑시대를 거쳐 계승되었으며, 특히 宋·元시기의 私印과 花押印, 몽고문자에 의한 元대의 사인이 특이하다. 아울러 收藏印과 堂印 등의 사용으로 이들이 서화와 함께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印材에 있어서도 元代에 靑田石, 明代의 壽山石이 발견되는 등 전각예술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각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시기는 明代이다. 특히 이시기의 文徵明과 그의 아들 文彭부자 그리고 문팽의 제자 何雪漁 등은 금석기의 刻法과 방각의 창안으로 전각을 예술적 가치의 대상으로 인식·발전시켰다. 이후부터는 여러 전각가에 의하여 새로운 印風이 수립되었고, 새로운 印派가 나타났다. 고증학과 금석학이 발달한 淸代에는 鄧石如 이후 趙之謙, 吳昌碩, 齊白石 등의 탁월한 작가들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새김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이미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빛살토기, 울주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등에서 보인 새김은 원시 조형예술의 일단이다. 그러나 완벽한 전각예술의 태두는 한국 근·현대 서법과 금석학의 대가인 秋史 金正喜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중국의 印學을 도입하여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金逈根과 같이 ?古硯齊印譜?를 공동 출간하였다. 이후 兪漢翼, 丁學敎, 姜璡熙 등의 전각가로 이어졌고, 더욱 근대 전각의 쌍벽을 이룬 吳世昌, 金台錫이 유명하다. 이들을 이은 작가로는 鄭基浩, 李基雨, 安光碩, 金齊仁 등이 있다. 이밖에 한국의 현대 전각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한 작가로 高鳳柱, 柳熙綱, 金膺顯, 鄭文卿, 尹亮熙, 權昌倫, 金洋東, 呂元九, 宣柱善, 田道鎭, 林在佑, 曺首鉉, 鄭丙例 등이 있는데, 여기서 특히 漢印을 바탕으로 吳昌碩 刀法으로 일가를 이룬 金膺顯의 제자로 呂元九가 있고, 그리고 여원구의 제자가 바로 죽암 여성구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죽암은 인생의 참뜻과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알려주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생 지침서인『채근담』의 모든 구절을 方寸의 공간으로 가져왔다. 이는 동양예술의 꽃이요 정수인 전각과 인생의 참된 뜻과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合一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전각은 새기는 자의 정신과 감정 등이 표출되어 독특한 미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오늘 출판되는 작품집은 작가의 文字學的 지식과『채근담』의 文學性, 그리고 筆意와 刀味의 조형감각이 함께하는 종합적인 예술집임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이 印譜集은 평면적인 정지 상태인『채근담』을 方寸의 공간에 입체적 생동감으로 옮겨 조형적 시각효과로 나타낸 예술행위인 것이다.
아래는 본집에 실린 전각작품의 특징을 살펴 단편적인 죽암의 예술세계를 분석하여 보겠다.
첫째, 죽암은 우리나라 전각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은 印材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가 굳이 海南石을 찾아 작업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함이다. 아울러 전서특유의 字例와 오묘한 筆致, 그리고 구성은 전서를 비롯한 능숙한 서법의 硏鑽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章法에 있어서도 印面 문자의 大小, 疏密의 균형, 輕重, 增損, 屈伸, 承應 등에 유의하여 ‘교묘하지만 너무 섬세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너무 평범하지 않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전체적으로는 고전의 정체성을 이어오고 있다.
둘째, 전통의 바탕에서 출발하였으나 縱橫無盡 無人之境이다. 옛 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포자는 주의를 기울여 섬세하게 하고, 칼로 새길 때는 대담하게 하라(細心落墨 大膽奏刀)”라고 했다. 이는 특히 運刀의 기법을 강조한 말이다. 죽암의 전각작품에 기법과 재료의 전통성을 지킴이 보이고 있다. 또한 더한 발전을 위해서는 실험적 노력을 하고 있음도 보인다. 이는 자신의 혼을 담고 있음이다. 다시 말해서 고전의 답습이 아닌 개성을 중시하고, 볼거리가 있으며 재미있는 무언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만의 색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죽암의 작품 <弄權一時凄凉萬古>은 방촌에서의 드넓은 천지를 여실히 펼치고 있다.
셋째, 부지런하고 근면한 노력형 천재이다. 그는 수없는 모각을 통하여 문자의 연속상태와 전체 분위기의 흐름에 자연적인 變化를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방촌의 공간에서 보여주는 印文의 盤錯, 離合 그리고 전체적인 구성의 마지막 단계인 邊緣의 자연스러움 모두는 그의 꾸준한 노력과 타고난 재능이 함께함이다. 그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붓과 칼, 그리고 책과 함께한다. 어느 날 필자가 傍刻에 대하여 물었더니, 그는 <장맹용비> 법첩을 30번, <원정묘지명> 등을 수백 번 칼로 새겼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의 숙련된 傍刻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여기서 죽암 전각의 또 다른 妙味인 ‘인의 측면에 문자를 새긴다고 하여 불린 명칭’인 側款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는 새기는 문자가 음각인 款과 양각인 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款識라고도 한다. 또한 이들을 傍刻이라 총칭하기도 한다. 이들은 明代 文彭과 何震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는데, 당시에는 긴 문장을 새기는 일은 없었다. 淸代 정경이 처음으로 측면에 각도로 직접 글씨를 새기게 되었는데 이들이 보다 자연스럽고 소박하였다. 이에 이후부터 긴 문장의 시문 등이 출현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죽암의 측관 刻法도 布字하지 않고 單入刀法에 의하여 새겨졌다. 그의 측관 글자의 특징으로 가로획의 경우 起筆과 末筆에 힘을 주어 칼을 넣고 떼고 있다. 세로획은 기필 부분에서 아래쪽으로 칼을 넣어 위쪽으로 밀어 올리듯 한 후 아래로 順筆한다. 竪鉤는 竪畫의 끝에서 칼끝에 힘을 주어 튕겨 갈고리 형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숙련됨은 작품 <抱樸守拙 涉世之道>에서 여실히 보여 진다.
冒頭에 말한 ‘희망’의 노란 꽃 영춘화는 ‘金腰帶’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또한 과거에 급제하면 어사화에 꽂혀서 영화를 나타낸 꽃이라 하여 옛사람들은 ‘어사화’라 부르기도 했다. 죽암의 이번 전각작품집 출판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희망하는바 모두 이루시고, 어사화 쓰는 영광을 기대하며 졸필을 접는다.
2019년 3월 10일
東方文化大學院大學校에서 原塘 李永徹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