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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회 개인전/관련기사

축사

[소박미(素樸美)와 교졸미(巧拙美)의 실현]

1.
청명한식(淸明寒食)을 지나 울긋불긋 형형색색 꽃들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겨우내 찌든 때를 씻어내는 가랑비와 기지개 켜는 새들의 합창 소리가 즐겁기 그지없네요. 문득 낙엽처럼 떨어지는 꽃잎 위를 걷노라니 새삼 봄의 끝자락이라도 손 내밀어 붙잡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아서라! 가득 차면 기우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을, 나뭇가지 끝에 부서져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로 아쉬움을 달랠 뿐입니다.  오늘! 아직은 남아있는 봄의 향기에 죽암(竹庵)선생의 전시향연(展示饗宴)을 대하니 이 또한 행복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주옥(珠玉)같은 55점의 서예작품과 500여 과의 전각작품을 내보이며, 천학비재인 나에게 그간의 인연에 몇 마디 머리말을 부탁하니 부득불 고사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다섯 번째 열리는 ‘도필주혼(刀筆鑄魂)’에 두서없는 글로 축하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2.
서예는 예술이기 이전에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문화의 하나이지요. 이는 성품(性品)에 따라 행하는 ‘도(道)’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행하는 이 ‘도’를 ‘예(禮)’라 이르니 서예는 이 둘인 ‘도’와 ‘예’의 ‘조화(和)’일 것입니다.  물론 ‘도(道)’는 형이상의 이치나 의미(『易·繫辭』 形而上者謂之道)라고 합니다. ‘형이상(形而上)’은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며 형체가 없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며 초 경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현실의 본질이나 마음과 물질의 관계, 그리고 우주의 근본원리를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인 것이죠.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물의 본질(근본적인 원리나 성질)을 찾는 것이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문자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서예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선(線)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형이상학은 서예의 기본적인 원리나 성질을 포함한 현실의 기본적 성질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겠습니다. ‘예(禮)’는 규율 또는 법도(法度)입니다. 『설문(說文)』에 ‘예(禮)’를 ‘리(履)’라 함은 당시에 유행했던 성훈법(聲訓法)에 따른것이지만, “예(禮)는 이행(履行)으로 예를 행함으로써 비로소 신(神)을 섬기고 복을 구할 수 있는 것(禮, 履也. 所以事神致福也)”으로 풀이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행함에는 일정한 법도와 규율이 있음도 알 수 있겠습니다.  ‘화(和)’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서예는 규율과 법도를 지켜 마침내 서예의 미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뜻이겠지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예의 ‘도’란 선(線)의 선택과 형상 추구의 창작범위로 특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독특한 발전 과정이 있으며 선천적 연원(淵源)의 서예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서예는 ‘선(線)’을 선택하여 넓고 좁음, 길고 짧음, 굽고 곧음 등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된 형상과 수단에 문화적 연원과 철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선’은 내재적(內在的)이며 단순하고 자유로운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니 서예는 이러한 ‘선’을 선택하여 내재 된 감정과 마음속 영혼의 표현, 그리고 탁월한 지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서예의 실천이란 결국 ‘선’의 조합이겠죠. 물론 여기에는 특정한 창작 도구와 창작 수단이 생기게 되었고, 중봉(中鋒) 등의 운필법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희재(劉熙載)는 글씨를 씀에 능히 “한 획 한 획마다 그 본연의 분수로 돌아가야 된다(筆筆還其本分)”고 말하였는데 여기에 장봉(藏鋒)과 출봉(出鋒) 등의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은 인류의 고급스러운 생명 활동이며 즐거움의 산물입니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한 것만 못하고, 좋아함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고 했습니다. 우주에는 오직 사람만이 정감(情感)을 느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정감이 있으니 재미를 느끼고, 또한 마음이 즐겁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네 인생은 정감의 삶이지 지능에 의한 삶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술은 창조이고 과학은 지능이라고 합니다. 창조는 인간 마음의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네 삶은 예술에 가깝고, 과학과는 멀기 때문에 인생은 결코 물질생활에 국한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도(道)에 뜻을 두며, 덕(德)을 굳게 지키며, 인(仁)을 떠나지 아니하며, 예(藝) 속에서 노닐었다”라고 했습니다. 서예는 마음과 감정의 산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과 생활 자체를 심미화(審美化)한 산물로 형식미와 감정적 요소의 직접적인 결합입니다. 등이칩(鄧以蟄)은 “서예는 순수 미술이며 예술의 최고 경지이다. 대개 붓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순수한 성령(性靈)의 독창(獨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서예는 곧 심법(心法)이다”는 말입니다. 고급 예술 형식인 서예는 일반예술의 감상적 가치와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일반 예술에는 없거나 도저히 따라올 수도 없는 ‘심신쌍수(身心雙修)’의 특별한 가치와 기능이 있다는 말입니다.

3.
죽암은 내면의 격정(激情)과 고민(苦悶), 득의(得意)와 우울(憂鬱), 또한 유유자적한 마음과 무절제함 등의 정취를 그의 작품에 이입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지향(志向)이며 덕목이고, 심미정취(審美情趣)이며 생활 태도가 반영된 자신의 문화일 것입니다. 아래는 이번 전시작품을 통하여 그의 취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는 이번 전시에 한글과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전각의 작품 등을 출품하고 있습니다. 이들 작품에 대한 저의 첫 느낌은 소박미(素樸美)와 교졸미(巧拙美)의 실현입니다. 먼저 소박하다는 말은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소(素)’는 원래 염색되지 않은 흰색 실을 가리키고, ‘박(樸)’은 갓 벌채한 통나무를 지칭합니다. 그러니 소박이란 원래 가공되지 않은 사물의 원형을 가리키는 말로 기교가 가미되지 아니한 자연스러움을 뜻합니다. 우리가 ‘소박하다’ 함은 단순히 사람의 품성이나 됨됨이를 일컫는 말일뿐만 아니라 예술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박’이라는 말에서는 노자(老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이 떠오릅니다. “크게 이룸은 모자람이 있는 듯하나 아무리 써도 닳지 아니하고, 꽉 차 있는 것은 비어있는 듯하나 써도 다함이 없고, 아주 곧은 것은 굽은 듯하고,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하고, 잘하는 말은 더듬는 듯하다. 움직여서 추위를 이기지만 고요함으로 더위를 이기니, 맑고 고요함으로 천하를 바르게 한다(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冲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納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는 것입니다. 즉 ‘대교약졸’은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하다”라는 뜻이니 여기 ‘대교약졸’은 평범한 말이 아니라 비범한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대교’란 뛰어난 솜씨나 큰 기교, 혹은 완성된 기교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교란 예술창작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기능을 갖추는 것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니 ‘대교약졸’의 줄임말이 곧 교졸(巧拙)입니다. 작품에서 보면 한글 성삼문의 시조 <낙락장송>과 <채근담 구절>, 성경 <누가복음 16장 구절> 등과 해서(楷書)로 쓴 <남극관선생 시(南克寬先生 詩)>, 그리고 행초서(行草書)의 <채근담구(菜根譚句)>와 <최치원 시(崔致遠 詩)>, 예서(隸書)의 <반야심경(般若心經)>, <신위선생 시(申緯先生 詩)>, <명심보감구(明心寶鑑句)>, 황진이(黃眞伊) 시 <상사몽(相思夢)>,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필의의 춘향전(春香傳), 『논어(論語)』 구절인 <사무사(思無邪)>, 목간(木簡) 필의의 <반야심경>, <서경(書經)구절>, 『논어』 <술이편(述而篇) 구절>, 목간 필의의 <제성예법(制性禮法)> 등은 소박미를 보여줍니다. 다음 교졸미(巧拙美)를 느끼게 하는 대표작품으로는 전서와 예서, 더욱 죽·목간(竹·木簡)과 팔분(八分)의 혼용(混用)인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논어』 자장편(子張篇)과 옹야편(雍也篇) 구절, 또한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구절>,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 구절인 <적선성덕(積善成德)>, 퇴계(退溪)선생 시 <독서(讀書)>, <중용(中庸) 구절>, 『안씨가훈(顔氏家訓)』의 <권학편(勉學篇) 구절>, <채근담(菜根譚) 구절>, 『사기(史記)』의 <불비불명(不飛不鳴)>, 『채근담』 구절인 <연비어약(鳶飛魚躍)>. 『장자(莊子)』 구절인 <토고납신(吐故納新)>, 『논어』 구절인<여조삭비(如鳥數飛)> 등입니다. 죽암은 매일 이른 아침 인사동 작업실에 출근하여 작업에 몰두하다가 저녁 늦게야 퇴근하는 변함없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시간이면 만날 수 있었다는 철학자 칸트의 일상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렇듯 그는 변함없는 일상과 달리 명리(名利)를 초월하여 예술창작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스스로 재주를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功)이 드러나고,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 간다.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에 세상 누구도 그와 다투지 못한다(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고 하였습니다. 이는 순일(純一)함을 지키며 현실을 초월하는 정신을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사고를 초현실(超現實) 미감(美感)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암의 이번 전시작품에 이러한 초현실의 미감이 보입니다. 그의 꾸준한 창작 과정에서 보인 초탈한 초현실 미감의 작품으로는 전각의 대작 <채근담 12곡병(曲屛)>과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8곡병>, <시편(詩篇) 23편 구절>과 <반야심경> 2점, 그리고 전·예(篆·隷) 혼용의 『채근담』 구절인 <춘풍추상(春風秋霜>, 『명심보감』 정기편(正己篇) 구절인 <정심응물(定心應物)>, 『회남자(淮南子)』 인간훈편(人間訓篇)의 <음덕양보(陰德陽報)>, 김병연(金炳淵) 시(詩) <설(雪)>, 『장자(莊子)』 구절인 <관화미심(觀花美心)>, 청허선사(淸虛禪師) 시 <과고사(過古寺)>, <숙종대왕(肅宗大王) 시>, 포은(圃隱)선생 시 <춘흥(春興)> 등이 대표적이라 생각됩니다.

4.
우리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서예작품으로 말하면 작가의 인성, 수양, 심미, 성격과 삶의 경지 등이 그 작품에 나타난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니 오늘 보여준 작품들은 그의 소탈하며 강직하고 부지런하며 정직함에서 나온 기교를 넘어선 자연스러움의 소박미와 교졸미의 실현일 것입니다. 정교하고 노련한 예술가에게서는 문득 모든 것을 초월하여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돌아가 담박하게 표현하려는 달관의 미적 욕구가 보입니다. 끝으로 꾸밈이 없고 진실하며 자연스러운 이런 미의식을 두고 중국의 미학자인 이택후(李澤厚)는 “원시적이고 천진한 졸박(拙朴)의 미”라고 하였다는 말씀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023년 4월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주임석좌교수 이 영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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